[윤무부 조류학 박사 인터뷰]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먹는다
윤무부 조류학 박사
 

취재팀이 자택에 들어섰을 때, 윤무부 박사는 거실의 대형 TV 속에서 흐르는 고화질의 영상을 보고 있었다. 어느 산 속, 둥지 안의 새끼 새들이 머리를 둥지 밖으로 꺼낸 채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화면이었다.
“팔색조예요. 정말 보기 힘든데, 지난 주에 부산에서 연락이 와서 내려가 찍어 온 겁니다. 너무 예쁘지 않습니까?”
무지개 색 깃털로 덮인 천연기념물 팔색조. 윤 박사의 표정은 오래 전 헤어진 친구를 다시 만난 것처럼 밝았다.
윤 박사는 인터뷰에 앞서, 그의 작업실과 그가 모은 자료실을 둘러보는 것을 허락했다. 4평 남짓의 자료실에는 30년 이상의 그의 발걸음이 쌓여 있었다. 사진 60여 만장, 동영상 필름 1300여 다발, 새소리가 녹음된 MD 320여 장이 방 안을 둘러싼 책장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생물학을 전공한 대학 시절, 조류학계의 권위자로 활동하던 교수 시절,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가 직접 촬영하고 녹음한 것들이다.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서 깊은 산 속에 흔적을 남긴 새가 다시 그곳에 나타나기를 몇 시간이고 기다려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새를 향한 그의 애정이 얼만큼 대단한 지 짐작할 수 있다.
인터뷰를 시작하며 윤 박사로부터 받은 명함에도 새의 모습이 있었다. 후투티(Hoopoe)가 그것으로, 윤 박사는 조류학자로서 살아온 인생이 바로 이 새로부터 시작됐다며 그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습니다. 공부는 잘하지 못했지만 탐구력이나 창의력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거제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철새들의 이동경로이기에 많은 새들을 볼 수 있는 곳이었죠. 초등학교 4학년 때, 집 뒤에 밭이 있었는데, 어느 날 이 후투티를 본 거예요. 너무 예쁘더라고요. 그때부터 새가 좋았어요.”
하지만 후투티는 봄, 가을에 잠깐 왔다 가는 새이기에 다른 날 다시 보려고 해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린 윤무부는 새 둥지, 새 알, 새 새끼 등을 집에서 직접 기르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벌레가 아닌 메뚜기를 먹이면서 말이다.
“바다 새를 많이 길러봤어요. 하지만 대부분 죽더군요. 메뚜기를 먹이니 당연한 결과죠.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되지만, 그 경험이 제가 새를 연구하기 시작한 본격적인 계기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중등학교를 서울에서 다니면서도 항상 생물반에 있었고, 한영고 재학 당시, 경희대에서 새 전시를 한다고 해 찾아가 그곳 대학생들과 친해져 이후 자연스럽게 그들의 후배가 됐다. 시골사람처럼 산에만 다니며 살지 말고, 정외과나 법대, 상대 등에 진학해 넥타이를 메라는 집안 식구들의 반대를 극복하고서 말이다. 윤 박사는 “지금도 그 선택이 너무 좋았다고 생각한다” 며 웃으며 말했다.

 


새와 함께 날아온 외길

윤무부 박사는 ‘새 박사님’ 이라는 별칭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언제부터인가 새와 관련한 학회나 방송에서 그가 없는 모습은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이고, 초등학생부터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국민들이 새에 관한 궁금증을 윤 박사에게 묻고 있다. 50여 년을 새와 함께한, 날아가는 새의 찰나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의 울음소리를 듣기만 해도 어떤 새인지 아는 윤 박사가 아닌가.
하지만 오늘날 조류학계에서 권위 있는 학자가 되기까지 숱한 어려움이 있었음을 윤 박사는 고백했다. 새가 너무 좋고 예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관찰하고 연구했지만, 그로 인해 희생해야만 했던 것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돈이 없어서 책을 못 사보고 카메라 망원 렌즈를 못 사고 했던 겁니다. 결혼하고 조금 안정을 찾기는 했지만, 여전히 돈 빌려서 렌즈 사고, 또 갚고…, 셋방을 열 세 번 옮겨 다니며 연구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외로운 길이었다는 것도 또 하나의 어려움이었다. 생물학과니까 많은 동료들이 새를 좋아해 함께 시작했으나 산에 오르고, 나무를 타고, 새가 나타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하는 시간들이 힘들어서 중도에 그만 둔 이가 대부분이었다.
지금처럼 개발이 이뤄지지 않았던 1960~1970년대, 환경이 덜 파괴되었을 때라 훨씬 많은 새를 볼 수 있기는 했지만, 산 근처에 식당이 없다거나 시골길에 가로수 불빛이 없거나 하는 어려움에 외면 받는 연구활동이었던 것이다.
윤 박사는 산 속에서 절을 발견하면 스님에게 밥도 얻어 먹고, 차비도 받았다고 회상한다. 어쩌면 새를 연구하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깊은 인내력도 절에서의 시간 속에서 키워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움은 또 있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남파 공작원들 때문에 검문소가 참 많았습니다. 저는 꼭 검문에 걸렸어요. 세수 잘 안 하죠, 똑 같은 옷을 며칠간 입고 있죠, 카메라를 들고 다니고, 가방 안에는 항상 쌍안경이 있고, 또 외형상 큰 키가 아니어서 간첩으로 오인 받곤 했던 거지요. 산에서 새소리를 녹음하고 내려오면 간첩신고를 접수한 경찰들이 기다리고 있기도 했고, 정보원들이 제가 사는 집에 수색하러 온 적도 있었어요.”
미소를 띄며 회상했지만, 육체적으로 고통 받던 당시에는, 외로운 길 위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듯한 서러움을 맛보았으리라.
하지만 윤 박사의 새를 향한 마음은 식지 않았다. 기다림 끝에 다시 온 새의 모습을 보고, 사진을 찍고, 새 소리를 녹음하는 그 시간이 무척 행복했기 때문이다.
“항상 같이 있으면 재미가 없지 않나요? 새는 봤다가 숨습니다. 있다가도 숲으로 싹 숨어요. 노래도 잘하고, 깃털도 예쁘고, 항상 이동을 하죠. 저는 새의 그런 특징들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희귀한 새나 처음 발견한 새, 즉 우리나라 조류 목록에 없던 새를 발견한 것도 큰 보람이었다고 한다. 물새 종류, 갈매기 종류 등에서 새롭게 발견한 새들에 윤 박사가 직접 이름을 지어 우리 조류 목록에 올린 것이다. 외국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새들이 태풍 등으로 간혹 왔다 가는데, 그럴 때면 큰 기쁨을 느꼈다고 윤 박사는 말했다.

 


새가 ‘운다? 노래한다? 지저귄다?’

새의 소리는 여러 동사로 표현된다. ‘울다’, ‘노래하다’, ‘지저귀다’ ……, 개가 짖고, 소가 우는 것 등과 다른 부분이다. 윤 박사의 강의를 들은 한 인터넷 블로거의 포스팅에서 이 사실을 접하고, 그 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궁금증에 그 이유를 물었다.
“보통 우리 나라에서는 운다고 하고, 미국에서는 노래한다, 일본에서는 지저귄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어려웠던 시절 식량이 많지 않을 때, 밥을 먹은 사람 귀에는 소쩍새가 ‘솥이 적다’며 우는 것 같고 굶은 이에게는 ‘속이 텅텅 빈다’로 들렸던 게 유래예요. 미국 사람들은 파티하고 술 먹고 하는 즐거움의 문화가 넓게 퍼져 있어, 노는 시간에 새 소리가 들리면 ‘새도 기분이 좋아서 노래를 하는구나’ 그렇게 불러온 거지요. 일본은, 제 생각이지만, 대륙을 침범하는 등 싸움이 많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새들도 싸우는 줄 알고 지저귄다고 표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나라마다 감정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다는 의미이다. 이는 새 소리뿐만이 아니다. 각 새를 바라보는 관점도 해당된다. 이를 테면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부엉이가 있는 곳은 흉가이고, 아기들이 울면 부엉이가 잡아간다 등으로 부엉이를 바라보지만, 유럽의 부엉이는 밤에 열심히 일하는 학자나 소방관, 수사관 등을 상징하는 좋은 의미로 인식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흉조이지만 일본, 유럽에서는 영리하고 머리가 좋은 새로 인식하는 까마귀 등이 그렇다.
물론 반대로 전 세계적으로 동일하게 인식되는 새의 특징도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새의 부지런함이다.
“미국에 갔을 때, 여러 초등학교에서 같은 문구를 접했어요. ‘The early bird catches the worm’,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먹는다는 거죠. 전 이 말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래서 강연을 할 때마다 항상 언급하지요. 일찍 일어나는 사람은 성공할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과 벌레를 먹기 위해 일찍 일어나는 새의 특징들은 나라마다 차이가 없다는 언급이었다. 새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윤 박사는 그래서 오래 전부터 일찍 일어나는 일상을 이어왔다. 2006년 겨울 뇌경색으로 쓰러지기 이전에는 항상 3~4시에 일어났었음이 이미 알려져 있고, 회복기를 보내고 있는 요즘에도 오전 6시면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일등 한 번 못해본 제가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그겁니다. 어느 곳에서건 건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은 인정받게 되어 있으니까요.”

 


후손들에게 그대로 물려줘야 할 자연

최근 윤무부 박사는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알려진 대로, ‘KBS 환경스페셜 조작 방송 의혹’을 제기하는 과정에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움을 했던 탓이다. 올빼미는 개구리를 잡아먹지 않는다거나, 토끼가 밤에 돌아다니지 않고 잠만 자는 특성이 있는 등을 무시한 채 연출된 화면으로 시청자들을 우롱한 방송을 접하고 평생을 생물학자로 살아온 윤 박사로서는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다.
“영국 BBC도 (자연 다큐멘터리의)70~80%를 연출한다거나, 일본 NHK의 자료를 자매방송국이기에 출처를 밝히지 않고 써도 된다 등의 말에 겁이 날 정도였습니다. 제가 확인을 해봤습니다. BBC는 절대 조작을 하지 않아요.”
방송 윤리에 어긋남은 물론이고, 전 세계로 나가는 프로그램이 조작된 것이면 국제 망신까지 이어진다는 게 윤 박사의 설명이다. 결국 KBS는 감사에 착수했고, 그 결과로 지난 달 사과 방송을 송출함과 동시에 해당 프로그램 제작자들에게 중징계를 내렸지만, 윤 박사는 “태어나 그렇게 정신적으로 고통 받은 건 처음” 이라고 말했다.
윤 박사의 고민은 또 있다. 환경파괴에 따른 생태계의 동반파괴와 철저한 조사 없이 행해지는 각종 시책이 그것이다.
“새는 아주 환경에 민감합니다. 우리나라에 습지 새들이 60% 이상인데 강을 정비하면 천연기념물과 같은 새들까지 다 없어집니다. 바다생물의 놀이장소인 갯벌도 마찬가지예요. 어마어마한 갯벌 땅이었던 서산의 천수막 간척사업 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환경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 만끽하고 살다가 후손들에게 그대로 물려줘야 합니다. 또한 비둘기를 유해조수로 지정한 것과 같은, 충분한 사전 검토와 학계와의 소통 없이 발표되는 시책도 문제예요. 비둘기가 과연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지 안 주는지 전문가들, 학자들과 깊은 상의를 해야 한다는 거지요.”
윤 박사는 외국의 경우 ‘유해조수 지정’과 같은 걸 발표하려면 6개월 내지 1년간 조사를 해야 한다는 점과 현재 파고다 공원, 종묘, 여의도 고수부지 등 일부 지역에 비둘기가 많지만, 몰려 있을 뿐 환경파괴로 말미암아 정작 비둘기의 수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점을 덧붙였다.


새 박물관 관장을 꿈꾸다

윤무부 박사의 ‘장래희망’은 박물관 관장이다. 1970년대부터 모아 온 새와 관련한 방대한 자료를 웹사이트를 통해 공개함으로써 전 세계 누구나 열람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인터넷 박물관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 영상, 소리, 각 종과 관련된 이야기 등을 영어, 불어, 독어, 일어 등 여러 언어로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말이다. 그러면서 윤 박사는 리모콘을 들어 다시 팔색조 영상을 틀었다.
“얼마나 예쁩니까. 팔색조, 하면, 소개하고 번식지 분포 등을 재미나게 써서 클릭하면 영상도 볼 수 있고, 소리도 들을 수 있고……, 전 세계인들이 다 볼 수 있잖아요.”
실제로 그의 고향인 거제시에서 관심을 가졌으나 무산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강원 화천군에서 작업실을 지어 준 이외수 작가가 이후 왕성한 창작 활동 및 문하생 양성을 통해 사회에 이바지 해 오고 있는 것처럼, 지방자치단체의 협조가 있다면 윤 박사의 귀중한 자료들이 보다 널리 알려질 수 있겠다는 대화가 취재팀과 오갔다.
“저는 교수를 했고, 지금도 새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전국의 많은 분들과 지식을 나누고 있습니다. 제가 사회에서 담당하는 역할은 사회봉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소개하면서 저도 더 공부가 되고요.”
이제는 전국을 넘어 전 세계와 새에 관해 소통하고 싶다는 의미로 들렸다. 정서에 따라, 나라마다 인식의 차이는 있겠지만, 새의 아름다운 깃털과 청명한 새 소리를 통해 전달되는 감동은 전 세계 누구에게나 똑같이 전해질 것이라는 게, 윤 박사의 생각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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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 태*일 2015-05-04 오전 10:02:00 잘읽었습니다
  • 김*우 2009-10-30 오후 9:52:00 한 분야에 몰두하신 대가의 집념과 애정이 느껴집니다. 정말 감동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