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래 꿍따리 유랑단 단장 인터뷰] “꿈이 있는 자에게 장애는 없다”
강원래 꿍따리 유랑단 단장
 

가을 햇살이 아름다운 10월의 어느 날 꿍따리 유랑단의 단장, 강원래를 만났다. 무대를 꽉 채우던 멋진 퍼포먼스의 주인공이었던 그가 아직도 눈에 선해서인지 사고 난 지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그의 휠체어 탄 모습이 낯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인사하자마자 쾌활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에 여전히 밝은 ‘강원래’다운 친근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현재 법무부 ‘명예보호관찰관’으로 6년째 홍보 대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소위 문제아라 불리는 불량 청소년들에게 메시지를 주는 것에 보람을 느껴 남들은 1년 하면 관둔다는데 저는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장애는 죄가 아니다

‘보호관찰소’는 죄가 약소한 죄인들의 재범방지를 위해 보호관찰, 사회봉사·수강 및 갱신보호 등 체계적인 사회 내 처우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하여 지도를 함으로서 건전한 사회복귀를 촉진하고 효율적인 범죄예방활동을 전개하는 곳이다. 강원래 단장은 이곳에서 연간 2만 5천여 명의 교통법규 위반사범과 5만여 명의 비행청소년들을 위한 전담강사로 한 달에 한 번, 전국 보호관찰소를 순회하며 강연을 펼쳤다.
“보호관찰소에 애착이 생긴 것은 그곳에서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한 청소년들을 자주 보기 때문이에요. 제가 어렸을 땐 아주 문제아였거든요. 학교 매점을 털다가 걸려서 제가 다니던 중학교 최초로 무기정학도 받았었어요. 그 외에도 나쁜 짓은 수도 없이 하고 다녔죠. 근데 그랬기 때문에 제가 연예인으로서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공부 잘하고 인간성 좋은 사람보다 끼 있고 잘 노는 사람이 연예인으로 성공할 수 있거든요.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날라리가 적성에 맞으면 날라리로 먹고 살면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모두에게 인정받는 날라리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말씀도 함께 하셨죠. 저 역시 그렇게 해서 성공했고요. 저는 청소년들에게 어느 분야든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라고 말합니다.”
강 단장은 가수로서 한국은 물론 대만, 중국에도 인기가 높았다. 수교가 단절됐던 대만에 한국어 교실이 생길 정도로 그의 춤과 노래는 한국의 이미지에 많은 변화를 이끌어냈다. 그는 성공을 위해 노래하고 춤춘 것이 남들에게 큰 의미를 줄 수 있다는 것에 보람과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가수로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위기가 닥친 것은 2000년이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중 불법 U턴하던 승용차가 그를 들이받아 척수손상마비로 평생 걸을 수 없는 아픔을 겪게 됐다.
“지금도 길을 가면 저를 알아보는 분들이 왜 오토바이를 타서 그렇게 됐냐고 하세요. 저는 교통신호 준수하며 가고 있었지만 지나가던 트럭이 불법 유턴하던 저를 들이받은 거에요. 저로써는 어쩔 수 없이 사고를 당한 거죠. 근데도 저에게 왜 그랬냐고 하시는 분들을 보면 아직도 힘들 때가 많아요. 못생긴 사람에게 너 왜 그렇게 못생기게 태어났느냐고 하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해요. 사고라는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뿐더러,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일어날 수 있는 거잖아요. 근데 그걸 너무 죄 인양 무슨 큰 잘못을 한 것처럼 매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끔 화가 나기도 해요.”
강 단장 역시 사고 후 하반신 불구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 힘든 상황이 주어졌나’하는 분노가 치솟았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었음을 깨달았다. 장애인이 죄인이기 때문에 장애를 갖게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제게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준 사람은 장애인이에요. 어떻게 보면 나쁜 거죠. 나보다 가난한 사람보고 ‘아, 난 부자다’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거니깐요. 그래도 나보다 힘들게 사는 장애인들을 보면서 힘을 얻었어요. ‘아, 저렇게도 살 수 있구나. 저렇게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구나. 저 사람들도 열심히 사는데 나도 열심히 살아보자’라고 생각하며 제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됐죠.”


돈보다 보람이 먼저

강 단장은 보호관찰소에서의 강의를 통해 자신이 필요한 존재라는데 보람을 느끼면 한 단계 더 나아가 자신이 잘하는 춤과 노래로 사람들에게 더욱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꿍따리 유랑단’을 조직했다. 유랑단을 위해 그가 모은 건 장애를 극복한 달인들이다. 안면근육마비를 딛고 장애인가요제에서 금상을 받은 심보준 씨, 폭발사고로 오른손을 잃었지만 뛰어난 마술을 보여주는 조성준 씨 등을 모아 전국의 소년원과 보호관찰소를 돌며 수차례 공연을 열었다.
“공연 내용은 간단해요. 보호관찰소에서 저에게 공연해달라고 부탁해요. 저는 계속 거절하죠. 그러다가 암전이 되면서 제가 장애인을 찾아가서 같이 공연하자며 부탁해요. 그리고 한 명씩 오디션을 보는 내용이죠. 이 오디션 자체가 실제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를 담은 책이 《꿍따리 유랑단》이에요. 이 책을 통해 장애에 대한 편견을 바꾸고 새로운 꿈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해요. 흑인해방을 부추긴 것도 《엉클 톰스 캐빈》이라는 소설책이라고 알고 있어요. 저 역시 우리의 책을 통해 장애에 대한 편견이 바뀌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공연 단장으로서 무엇이 가장 힘든지 물어보자 강 단장은 가만히 웃으며 가방에서 《설득의 기술》이라는 책을 꺼내 보였다.
“책이라면 길에 있는 돌보듯 하는 제가 얼마나 다급했으면 이런 책까지 샀겠어요(웃음)? 사고 전에 10년 정도 가수 트레이너로 일했었어요. 쉽게 말하면 안무가인 셈이죠. 가수가 어떻게 등장하고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 시선 처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하나 코치했었습니다. 그때는 항상 강압적으로 했어요. 무조건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라고 명령했어요. ‘잘했다’고 칭찬도 한 적이 없죠. 근데 꿍따리 유랑단을 이끌면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꿍따리 유랑단에서 공연을 연습하며 트러블이 가장 심했던 배우 A씨는 강 단장이 강압적으로 명령하자 극단을 나가버렸다. 예전 같았으면 나간다는 사람 잡지 않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A씨에게 편지까지 쓰며 나가지 말라고 ‘부탁’했다. 강 단장에게는 머리털 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예전에는 가수가 ‘안 한다’고 하면 ‘하지 말라’고 큰소리쳤을 텐데 이제는 배우들에게 맞춰가고 있어요. 단장으로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일, 그게 저한테는 가장 힘든 일이었어요. 지금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책도 읽고 사람들의 심리를 파악해가며 인간적으로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강 단장은 꿍따리 유랑단 단장으로 살면서 자세뿐 아니라 일의 우선순위도 바뀌었다.
“꿍따리샤바라 공연할 때는 공연 끝나고 내려오면 매니저에게 ‘야, 다음은 어디야? 거긴 얼마래? 어저께 얼마 입금 됐냐? 내일은 또 어때?’라고 물으며 사는 게 하루 일과였어요. 무조건 돈이었고 그게 인생 전부였어요. 그때 저에게 ‘일이 보람되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지금은 왜 그때 그런 이야기를 아무도 안 해줬을까 아쉬운 맘이 들죠(웃음). 무엇이 더 옳다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때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서 편했고 지금은 인간적으로 움직이니깐 행복해요.”
강 단장은 예전보다 돈은 못 벌고 육체적으로 조금 힘들지만 일 끝나고 오는 길에 한강을 바라보면서 ‘좋다’라는 느낌이 들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행복하고 보람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이 나한테 손가락질 할 때도 웃으면서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의 자세가 어떻게 보면 장애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어쩔 수 없는 방법인 것 같아요. 한 순간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씩 경험을 쌓아가며 변하고 있죠. 이제 저는 휠체어 탄 사람들만 봐도 반가워요. 저 친구도 나랑 똑같은 아픔이 있겠지, 하고 괜히 말 걸어보고 싶고, ‘어떻게 하다가 사고 났어요? 휠체어 어디서 샀어요? 라고 얘기하다 보면 금방 친해져요. 얘기하다 보면 술 한 잔 마시고 힘든 얘기도 하죠. 확 여유로워지거나 너무 행복해지는 건 아니에요. 그렇게 조금씩 변해가는 거죠.”

장애인이라고 아무것도 못하나요?

강 단장이 꿍따리 유랑단으로 많은 무대를 돌며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영등포 교도소’에서의 공연이다. 그곳에는 살인자, 강도, 강간범 등 모두 실형을 받은 죄수들이 있었다.
“영동포 교도소에 가서 충격을 받았어요. 죄인들이 다 착하게 생겼더라고요. 영화에서 보면 죄인은 모두 무섭고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이잖아요. 근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이런 편견은 장애인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장애인도 실제로 보면 달라요. 장애인이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죠? 근데 그렇지 않아요. 물론 심한 장애를 갖고 있는 분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도와드려야겠죠. 하지만 저같이 적당히 불편한 사람들은 약간의 배려만 있으면 충분히 똑같이 살아갈 수 있어요.”
강 단장은 사고 이후 굉장히 예민해져 난폭하고 폭력적이었을 때 심리치료를 약 8주 정도 받았다. 그때 심리치료를 하신 선생님이 그가 그처럼 난폭해진 것은 ‘약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포악하고 별것도 아닌 일에 화내는 장애인들을 자주 볼 수 있는데, 그들이 그러는 이유는 자신의 육체적·심리적 상처를 숨기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강 단장은 영등포 교도소에 갇힌 사람들을 보며 그들도 모두 착한 사람인데 마음이 여려서 가난을 숨기고, 부모님이 없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어릴 때 말썽을 피웠거나 돈을 훔쳤거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도 따뜻한 손길이 있었다면 그들 역시 우리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며 하나의 꿈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성공과 실패, 종이 한 장 차이

하반신이 마비가 되는 큰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금처럼 밝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강 단장은 ‘극복’이라는 단어는 잘못된 단어라고 정정했다.
“극복이라는 건 없어요. 수용하는 거죠. 제가 병원에서 교육받은 것이 ‘부정 → 분노 → 좌절 → 수용’의 과정이에요. 사람은 처음에 힘든 일이 있으면 부정하게 된데요. 저도 못 걷게 된다는 말을 듣고 설마 했어요. ‘수술하면 낫겠지’라고 생각했죠. 근데 걸을 수 없다는 것이 실제로 느껴지면서 화가 났어요. 의사한테 소리치고 욕도 했었죠. 그러다가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단계, 즉 수용하게 되는 거죠. 저는 마음이든 몸이든 깊은 받은 상처를 지우는 것은 불가능하고 생각해요. 지금도 가끔 화도 나고 죽고 싶을 때도 있고 그러다가 기분이 좋아질 때도 있거든요. 저 역시 아직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 중에 있는 거죠. 제가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해하면서 긍정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강 단장은 사람들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가진 아쉬움에 대해 토로했다.
휠체어를 타고 밖에 나오면 사람들이 ‘불편하시죠?’라고 묻는 거에요. 난 힘들지 않는데, 힘들게 보는 시선이 절 더 힘들게 해요. 길거리를 나가면 ‘몸도 불편한데 왜 나오셨어요?’라고 말하는 이야기가 저를 힘들게 하는 거죠. 약간 불편할 뿐인데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처럼 여기는 사람들의 시선, 이러 부분이 고쳐지면 장애인들이 더 편하고 자유롭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강 단장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그 무엇보다 ‘꿈’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다’라는 계획 없이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저랑 같이 입원했던 6명 중 한 명이 자살했어요. 꿈이 없어서 그랬다고 생각해요. 환경이 좋든 나쁘든, 그것을 바라보는 생각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꿈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살아간다면 어떤 환경이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지금 살아가는 것처럼요(웃음).”
강원래는 항상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며 세상의 편견을 바꿔나가고 있다. 청소년 시절, 나쁜 짓을 일삼는 문제아였지만 자신의 끼를 살려 최고 인기 연예인으로 성공한 클론의 강원래. 교통사고 이후 더는 춤은 출 수 없게 되었지만 국내 최초로 장애인 연극단을 만들어 장애인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꿍따리 유랑단의 단장 강원래. 성공과 실패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을 그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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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태*일 2015-05-04 오전 10:01:00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