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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류의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건강상태 또한 좋아졌다고 하더라도 70대 중반의 할머니가 하루에 8시간씩을 매일같이 강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기업교육의 현장에선 50대만 돼도 교실의 딱딱한 의자에 2~3시간 앉아 있는 것 조차도 힘들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여러 명의 손자들에게 할머니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그녀는 일산에서 서초동의 연구실까지 매일같이 출근하며 쉼 없는 강의를 하고 있다. 한번 시작되는 강좌는 하루 8시간씩 진행되고 있다. 주인공은 바로 대한민국에 NLP라는 새로운 상담기법을 최초로 소개한 것으로 유명한 대한민국 1세대 상담전문가 전경숙 박사다. 1961년 늦여름. 한국의 여고에서 영어교사를 하던 스물일곱의 젊은 여성이 LA국제공항에 내린다. 5층을 넘어가는 건물은 반도호텔 정도였던 서울을 떠나 도착한 LA는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생전 처음 접한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를 보면서, 1950년대 중반 대학을 다니면서 꿈꾸던 미국유학, 문교부에서 시행하는 유학시험에 합격한 사람만이 유학을 갈 수 있던 시절, 영어책과 역사책을 안고 밤 늦은 시간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지난날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 일제시대에 초등학교를 다녔고, 고교시절 경험한 6.25전쟁과 그녀가 살던 당시의 시대상황은 20대의 꽃다운 처녀에게 ‘인생이란 무엇인가?’ 라는 화두는 풀지 않으면 안 되는 갈증의 원천이었다. 그녀는 삶이란 것이 무엇인지,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지 않고선 하루하루를 견딜 수가 없었다.

명문 프린스톤대 신학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인간이해에 대한 갈증을 가지고 뉴욕대대학원에서 상담심리로 다시 석사학위를 받는다. 월든대대학원에서 상담심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미국에서 수십 년간 대학교수이자 전문상담가로 활동한다. 1995년 정년을 몇 년 앞둔 환갑의 나이에 미국대학 교수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 할머니 박사는 귀국 후 70대 중반을 훌쩍 넘어선 지금까지 15년간 NLP보급을 위해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전경숙 박사와의 만남을 통해 도전하는 삶의 원동력은 무엇인지, 무엇이 그녀를 이토록 지치지 않고 열정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게 하는지, 삶의 다양한 굴곡을 어떻게 이겨내고 창조해 왔는지 오래된 삶의 지혜를 배워보기 위해 그녀의 연구실을 찾았다. 방문은 5월 15일 스승의 날 오후. ‘스승의 은혜에 감사합니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화분과 난들이 보였다. 역시나 토요일인데도 상담을 배우는 제자들과 수업 중이었다.
이성엽 교수(이하 이성엽) 30~40대 직장인들이 보는 리더십 전문 월간지입니다. 박사님의 인생경험이 간접적인 공부와 교훈이 될까 싶어 찾아왔습니다. 전경숙 대표나는 젊은 아이들이 본 받아야 할 인물이 아닙니다. 그저 승복입고 산에 들어가 살아야 할 사람인데 도움이 될까요?
이성엽 하하. 충분히 도움이 되고 공부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저 편하게 말씀을 해주시면 잘 전달하는 것은 제 역할이니까요. 학부 대학시절 전공은 무엇을 하셨는지요? 전경숙 영문학과 신학을 전공했습니다.
이성엽 당시 여성이 대학가기란 쉽지 않았을 텐데 계기가 있으신지요? 전경숙 안동 하회마을 옆 산속 자그마한 시골에 살면서 안동에 있는 기독교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아주 명성이 높으신 목사님이었습니다. 서울에 공무로 자주 오시는데, 졸업 후 서울에 와 있으면서 가족들의 반대로 대학 입학원서도 내지 못한 나를 불러내 끌고가 대학 입학시험을 보게 해 합격도 하고 등록금도 마련해 긴 학업을 마칠 수 있는 오늘의 저의 바탕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별 재주도 없는 나를 잘 봐주신 그분을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에 전율이 흐르고 후배들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눈시울이 젖어집니다.

이성엽 고교시절부터 상담에 관심이 있으셨는지요? 전경숙 여고시절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이성엽 대학시절엔 어떤 꿈을 꾸셨는지?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으셨는지요? 전경숙 기적 같은 일들을 심상에 그리면서 배움에 대한, 알고 싶은 욕심이 가득 했습니다. 인생에 대해 알고 싶고 자연의 법칙에 대해, 신에 대해, 죽음에 대해. 학문적 호기심이 영어를 열심히 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살겠다라는 살고 싶은 미래는 상상할 수 없는, 전혀 미래가 보이지도 않고 볼 수도 없었던 시절입니다. 내가 하는 일에 주변에서 크게 도와주는 지원자가 없었다는 이유도 될 것 같아요. 그래도 열심히 살겠다, 궁금한 것을 알아야겠다는 마음. 당시 신앙심이 나를 고독하게 유지시키는 힘으로 작용했습니다. 여성스러운 결혼 같은 것도 꿈이 아니었습니다. 대학교수도, 훌륭한 지도자도, 어떤 분야의 전문가도 나는 꿈꾸지 않았습니다. 그저 현실에 충실하며 해야 하는 일, 지금 옳다고 여겨지고 느껴지는 것에 최선을 다 하는, 미련하나 착실하게 남을 돕고 세상을 알고 인생을 알고 살고 싶었습니다.

이성엽 대학 졸업 후엔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전경숙 미국에서 그 해 장학금 지급이 안 되는 사정으로 당장 유학을 가지 못하고, 교육부 영어 역사시험에 합격한 이유로 영어선생으로 취직이 쉽게 돼, 1959년 전라도 목포에 있는 정명여고에서 1959년~1961년 1년 반 정도 영어 선생님을 했습니다.
이성엽 미국에서 그 해 장학금 지급이 안 되는 사정으로 당장 유학을 가지 못하고, 교육부 영어 역사시험에 합격한 이유로 영어선생으로 취직이 쉽게 돼, 1959년 전라도 목포에 있는 정명여고에서 1959년~1961년 1년 반 정도 영어 선생님을 했습니다. 전경숙 삶에 대해, 우주에 대해 궁금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학은 국가시험에 합격해야 하고 장학금도 받아야 갈 수 있었습니다. 국가시험엔 합격했으나 전 장학금을 받을 때까지 기다린 것이지요. 그리고 교사를 하면서 유학여비를 조금이라도 준비하려 했죠. 그런데, 당시 목포의 학교에서 제자들은 섬에서 나와 공부하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등록금이 없어서 학업을 지속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때 월급으로 섬에서 온 아이들 등록금을 대신 내 주면서… 유학 갈 때 보니 돈이 없더군요.
이성엽 제자들에게 사랑을 많이 나누셨네요. 전경숙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71년인가 72년쯤 연세대에 교수로 와있을 때 신촌을 지나고 있는데 어느 아주머니가 길에서 저를 보고 잡는 거에요. 전경숙 선생님 아니시냐고. 알고 봤더니 목포 정명여자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제자인데 그 이야길 하더군요.
이성엽 대학은 물론 고교진학도 어렵던 시절인데 유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나 특별한 동기가 있으셨는지요? 전경숙 공부, 배움에 대한 열망이 컸어요. 호기심을 갖고 공부하고 무엇인가 알아가는 기쁨에 밤이면 영어학원을 쫓아다니면서 더 배우고 싶었던 마음이 열열 했어요. 그 무렵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한국기독교대학 교수양성 스칼라십 2년을 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저도 모르게 제가 추천돼 지원서를 제출한 경험이 있었어요. 근데 당시 제가 너무 젊다고 기존 대학교수도 유학을 다녀오지 않은 분이 많다며 2년 후로 미루자는 통지를 받고, 제가 직접 학교를 선정해 원서를 받아 스칼라십도 받고 입학허가를 몇 군데 받았어요.
이성엽 그 당시를 회상해 보면 어떤 힘이 그러한 결과를 만들게 했다고 보시나요? 전경숙 진학할 학교를 선정하는데 교수님의 도움을 받았어요. 너무 미국을 모르는 시대여서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아슬아슬한 모험이었는지 식은 땀이 납니다. 다시 돌아가도 그런 준비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과정 모두가 자기자신과의 도전이었습니다. 문교부 시험 치른다고 영어책 역사책 안고 밤 늦게까지 통금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전 집에 돌아 오던 일. 사실 마음속으로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아무도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은 없었어요.
이성엽 집에서도 지원해 주지 않으셨나요? 전경숙 아버님께서 유학이야길 들으시곤 시집 보내겠다고 선을 만들어 주고 하셨어요. 교육부 유학시험도 가족과는 의논 없이 제가 치른 것이에요. 그때가 1950년대 초반입니다. 여자가 공부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시절이었어요.

이성엽 미국에 처음 도착하실 때의 심정을 표현해 주신다면? 전경숙 1961년 미국은 천국과 같았습니다. 한국에서 못 보던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 공항시설, 높은 건물, 모두가 정신을 잃어버리고 어리둥절했습니다. 혼란스러웠고요. 당시에 서울의 5층 이상 건물이 반도호텔 정도였는데….
이성엽 유학생활 중 힘들었던 것은? 전경숙 행동과 생각을 미국사람과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이 힘들었어요. 초기에는 언어적 장벽 때문에 가슴 속에 있는 느낌을 나눌 수 없는 답답함. 문화적 장벽. 한국에선 핫도그 한번 구경해본 적이 없는데 음식이 달라지니…. 그리고 요즘과 달라요. 요즘엔 미국에 언제든 왔다 갔다 할 수 있지만 당시엔 한번 미국에 들어가면 나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습니다. 비행기표가 얼마나 비싼데요. 전화도 할 수 없었어요. 국제전화는 상상도 못할 만큼 비쌌고 한국엔 전화가 있는 집은 거의 없었어요. 제가 유학 갈 땐 우리나라에 텔레비전 방송도 하지 않던 시절입니다. 어떤 용기가 저를 그렇게 이끌었는지 모르겠어요. 아마 신앙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성엽 유학생활 중 기뻤던 것은? 전경숙 책이 정말 많았어요. 도서관에서 마음대로 공부할 수 있었던 일이 제일 신났습니다. 몇 안 되는 한국 학생들 만나는 것도 즐거움이었어요.
이성엽 당시 함께 공부하셨거나 교류가 있었던 유학생들 기억나세요? 전경숙 다들 은퇴하셨는데요. 숭실대 총장 어윤배, 전주대 총장 이종철, 계명대총장 신일희, 한일장신대 총장 김용복, 이화여대 소흥열 교수, 김영 교수, 포항공대 총장 했던 정성기씨, 전 과학부 장관 권숙일 그리고 이홍구 전 국무총리, 전 통일부 장관 한완상 씨 등이 기억나네요. 제가 프린스턴대와 뉴욕대 유학시절 미국에서 함께했던 또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이성엽 전공을 심리학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으시다면? 전경숙 남을 도우며 삶의 의미를 느끼려면 사람을 알아야 한다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이해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상담심리를 공부하게 됐어요.
이성엽 상담심리학 박사신데, 이력을 보니 석사를 두 번 하셨네요. 전경숙 원래는 신학을 전공하러 갔습니다. 프린스턴대학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했죠. 공부하다 보니 목회상담도 재미있고 사람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뉴욕대학 대학원에 들어가 상담심리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성엽 어려운 시절 명문대학에서 수학을 하셨네요(웃음). 전경숙 그것도 이야기 하면 길고 깁니다. 원래 샌프란시스코신학대학에 가려고 했어요. 3군데 대학에 지원했는데 가장 먼저 풀(Full)스칼라십으로 연락 온 곳이 샌프란시스코였어요. 그래서 출발한 거죠. 당시 샌프란시스코를 갈 때는 LA로 갔습니다. LA 공항에 도착했을 땐 저녁시간이었죠. 1961년 자그마한 동양여자가 LA에 도착해선 정신이 없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안동에서 만났던 선교사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중고시절 우리 학교에 선교사로 계셨던 분인데 미국 돌아가시면서 혹시 미국 오면 전화하라는 연락처를 갖고 있었거든요. 한국에서 미국 간다고 전화할 수 있는 여건이나 상황은 아니었고요. 국제전화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니. 그저 전화번호 들고 LA공항에 도착해서 전화해야지 하며 전화한 것입니다. 그때가 밤 11시 가까이 됐는데, 선교사 선생님이 반가워 하면서 오늘은 너무 멀고 늦어 데리러 가기 어려우니 차를 타고 YMCA 가서 하룻밤 자고 있으면 다음날 아침 픽업을 하로 가겠다 하시더군요. 전화를 끊고 이동을 하려 하는데, 바로 뒤에서 전화를 기다리던 백발의 노부부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물어 보시더라고요. 한국에서 왔고 YMCA로 간다고 말씀 드리니 지금은 너무 늦어 YMCA에서도 숙소 구하기 어려우니 집으로 가자고 하시더군요. 조금 전 전화하신 분 전화번호를 달라고 하시더니 직접 전화하셔서 설명 하시더라고요. 처음 도착한 미국 땅에서 처음 만난 노부부를 따라 그들의 집으로 갔습니다. 공항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었는데, 그날 밤 자라며 내준 큰 방과 큰 침대, 놀랐습니다. 큰 침대에 누우니 바람소리, 새 소리… 갑자기 눈물이 왈칵 나더군요. 다음날 선교사께서 오셔서 저를 데리고 갔는데, 하룻밤 묵은 노부부는 교회 장로셨어요. 그분들의 사랑을 생각하면 내가 세상에 와서 많은 것을 받아가는데, 나는 세상에 무엇을 줘야하나… 엄숙한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안동에서 선교활동 하시다 미국으로 돌아가신 선교사 선생님은 나이 많은 아주머니셨어요. 그분 댁에 머물면서 대학원 진학 이야기를 하다가 학교가 프린스턴으로 바뀐 거에요. 그러시더군요. 이왕 공부하려면 그것도 신학이라면 프린스턴신학대로 가야 한다구요. 근데 문제는 제가 당시 25달러가 전 재산이었죠. LA에서 프린스턴대학이 있는 뉴욕 쪽으로 갈 수 있는 경비가 아니었어요. 정말 무슨 용기로 미국엘 갔는지. 그런데 프린스턴에도 원서 내고 합격하니 선교사 선생님께서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를 마련해 주셨어요. 너무너무 많은 도움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이성엽 정말 영화를 찍어도 될 것 같네요. 그렇게 해서 프린스턴에서 신학을 하고, 신학공부 하시다 인간상담에 대한 호기심으로 뉴욕대에서 상담을 공부하신 거군요. 박사공부를 하실 때 주로 연구하신 분야는 무엇인지요? 전경숙 인간 본성과 욕구 충족, 성찰과 영성이 주된 공부의 화두였습니다.
이성엽 박사과정 마치신 후 미국에서 주로 어떠한 생활을 하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전경숙 대학에 강의를 하고 상담을 하면서 특히 50년~60년대엔 연방정부 지원금으로 미국으로 이민 온 여러 나라 사람들이 새로운 나라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부의 직업 교육, 미국정착교육을 정부 위촉으로 했습니다. 대학 근무할 땐 대학 프로젝트 진행 많이 했고요. 미국 심리학자들과 같이 심리크리닉도 공동 운영했습니다.
이성엽 교수로서 학교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상담소도 운영하셨군요. 많은 곳에서 동서양의 문화차이를 이야기 합니다. 동양 여성에게 미국인들이 상담을 받으려 하던지요? 전경숙 저를 제외하곤 같이하는 상담소 운영하던 상담가들이 미국사람들이라 그런지, 아니면 제가 미국에 오래 살아서인지 많이 상담을 했습니다.
이성엽 상담 시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가 있다면? 전경숙 풍습 또는 문화에 따른 가치관이나 신념에 따른 행동이나 사는 방식이 다르지요. 허나 인간 내면의 세계나 본능적인 면으로 들어가면 인간은 동일합니다.
이성엽 미국에서의 상담가의 역할이나 인식은 어떠한지요? 전경숙 분명한 입니다. 혼자 다스리기 힘든 일들은 정신이상이 아니더라도 전문가를 찾아 상담하는 것이 일상화 돼 있습니다. 상담자가 심리학자이면 건강보험에 의사와 꼭 같이 비용 청구를 건강보험에 할 수 있습니다. 이성엽 정신과 의사와 상담가의 차이가 미국은 어떠한지요? 전경숙 상담가가 심리학자이면 미국에서 법적으로 전문가 신분은 정신과의사나 상담가나 같습니다. 정신과의사는 구술적인 긴 상담을 상대적으로 못하고 약물 처방을 주로 하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저도 심리학자로서 ‘Spring Grove Stale Hospital’에서 인턴과정을 이수했습니다.
이성엽 다시 생각해봐도 당시 여성이란 입장에서 유학도 힘들지만, 가정을 꾸리고, 공부를 하고,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닐텐데, 결혼은 언제 하셨는지요? 가족에 대해 소개해 주실 수 있는지요? 전경숙 유학시절 남편을 1963년에 만나게 되고, 제가 34살이던 1968년에 결혼을 해 딸아이 둘을 70년과 72년에 낳았습니다. 큰딸은 결혼해 아이 셋의 어머니이며, 막내는 미혼입니다. 모두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경제전문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입자물리를 전공한 과학자이며 지금은 과학문화진흥회 이사장으로 맹활약 중입니다.
전경숙 박사의 남편 김제완 박사는 콜롬비아대학에서 입자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활동 중 1972년부터 1997년 정년퇴직 때까지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로 근무했다.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이며 과학문화진흥회 이사장이다. 2005년 세계 물리의 해 ‘빛의 축제’를 주관했으며, 한국조직위원장이었다. 저서로는 《겨우 존재하는 것들》《빛은 있어야 한다》 《상대성 이론, 그 후 100년》 등이 있다.
이성엽 남편께선 1972년 귀국해 97년 정년퇴직 하실 때까지 서울대에서 교편을 잡으셨는데, 전 교수님께선 미국에서 95년에 귀국하셨습니다. 가족이 떨어져 계셨나요? 전경숙 남편이 1972년 서울대 교수로 오면서 저도 연세대 교수로 왔습니다. 연세대 신학대학의 상담전공교수로 왔죠. 3년간 연세대에서 근무했습니다. 76년 남편이 존스홈킨스대학(Jones Hopkins University) 교환교수로 미국 들어갈 때 저도 톨레도대학(Toledo University) 교환교수로 갔습니다. 남편은 이후 귀국했구요. 저는 그냥 미국에 딸아이 두 명 데리고 남았습니다. 연세대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미국에서 케이턴스빌대학 상담교수로 78년 임용돼 근무했습니다.
이성엽 가족이 떨어지는 것이 쉽지 않은 결정이셨을텐데… 전경숙 저는 배우고 싶은 것이 많았어요. 미국에서 계속 공부해야 하는데 배울 것이 너무 많은데 40의 나이에 그냥 한국에 눌러앉아 대학에서 교수를 하는 것은 답답했습니다. 모르는 게 너무 많은데, 배울 것이 너무 많은데. 원래 교수가 꿈이 아니었습니다. 우주에 대해 알고 싶었지요. 남편과 의논해서 초등학교도 안 들어 간 딸 둘 제가 키우면서 저는 미국에 남았습니다. 남편과는 여름 방학 때 그저 만나고 했지요.
이성엽 NLP가 무엇인지 간략히 소개해 주신다면? 전경숙 NLP는 ‘Neuro Linguistic Programming’의 약자로서 상담은 물론 기업교육훈련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는 최신상담이론입니다. 사람을 우수하게 살 수 있도록 변화시키고 능력을 개발하는 심리적 도구를 제공하는 과학적 기술입니다. 마음의 신비를 터치하여 무한능력의 소제를 찾아 감동적으로 이를 경험하게 하는 놀라움이 숨어 있지요.
이성엽 국내에 가장 먼저 NLP를 소개해 주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제 어떤 계기였는지요? 전경숙 1992년에 숭실대학에 교환교수로 와서 한국상담심리치료학회 연차대회 발표를 하게 됐습니다. 이것이 계기로 단체 세미나 정기훈련이 중앙대에서 진행됐으며, 한국심리학회도 추계 수련과정에서 발표했고, 이어서 카운셀러협회, 아동학회, 정신사회복지학회, 가톨릭사제협회, 교원연수원 교육 등으로 이어지고, 다양한 개별훈련 프로그램이 진행됐습니다. 그때 열심히 참석했던 분들이 유기섭 교수(중앙대), 최혜림 교수(서강대), 이재창 교수(홍익대), 임용자(원광대) 등입니다. 그런데, 92년 숭실대에 와 있던 것이 돌아오는 계기가 됐어요. 두 딸도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는 성년이 됐고, 60세 환갑의 나이가 되니 미국에서 정년을 채울 때까지 남편과 떨어져 있는 것도 싫더군요. 그래서 1995년 미국에서 사표를 내고 귀국한 것입니다.
이성엽 95년 귀국하셔서 바로 NLP과정을 개설하신 거군요? 전경숙 아닙니다. 95년 귀국하니 프린스톤대학에서 함께 공부하던 김용복 박사가 자신이 총장으로 있던 한일장신대학에 교수로 와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생각지도 않다가 후진 양성한다는 생각으로 한일장신대학교에 60의 나이에 임용돼 근무했습니다. 인생은 항상 그 순간 최선의 선택을 하면서 사는 것이지요. 미국에서 교수 그만두고 들어와 60에 국내에서 임용되는 것은 전혀 계획은 아니었어요.
이성엽 국내에서 처음으로 프랙티셔너 양성과정을 열었다고 하셨는데 언제인지요? 전경숙 1995년경에 2박3일 또는 1박2일을 몇 번씩 하면서 당시 180시간 자격 이수하신 분들이 2000년도에 1회기 자격을 8명이 받았습니다. 다들 대학에서 교편잡고 있던 분들인데 유기섭, 장연집, 임용자, 안경숙, 손승아, 유계식, 이화연, 김선아 교수 등입니다.
이성엽 지금까지 박사님께 NLP를 소개받거나, 훈련 받은 분들은 어떤 분들이 있으신지요? 전경숙 제게 NLP 프랙티셔너 훈련을 받으신 분들이 350명 정도입니다. 지금 산업훈련 쪽에서 열심히 NLP 가르치는 심교준, 윤영화 박사 등도 프랙티녀서 과정을 거쳐갔고요. 각 분야에서 멋지게 활동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성엽 박사처럼 프랙티셔너 뿐만 아니라 마스터프랙티셔너까지 300시간 이상을 훈련받고, 미국에서 NLP트레이너 훈련까지 한 제자들은 버클리에서 박사 받고 온 명지대 김정민 교수, 대구대 신선인 교수, 나사렛대학 김선애 교수, 서울여자대학교 강차연 교수, 선문대 오규영 교수, 인천교대 김현재 교수, 동덕여대 박의순 교수, 수원여자대학 박정은 교수 등이 있습니다.
이성엽 지금은 상담뿐만 아니라 교육분야에서 NLP가 많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NLP를 어떤 곳에 활용할 수 있을까요? 전경숙 NLP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분야에 적용되는 성취 기술을 알려줍니다. 무슨 직책이나 자기 다스리기, 영향력 발휘하기 등 무엇을 잘하고 우수하게 수행하려면 이 기술을 배우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성엽 NLP를 만드신 분들이 지금도 미국에서 활동하는지요? 미국의 NLP 상황이 궁금합니다. 전경숙 창시자들이 열심히 미국에서 활동하고 어떤 분들은 영국에서 계속 열을 올리시지요. 그런 이유인지 영국 사람들은 5사람 중 1명이 NLP를 공부한 사람이랍니다. 미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활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우리나라에 비하면 전문가훈련을 시키는 기관이 그리 많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이성엽 박사님께선 다른 사람이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전문가신데, 스스로 힘들고 어려울 때 어떻게 이겨내시는지요? 전경숙 살면서 힘든 일은 자신의 지각에 달려 있어요. 산다는 것이 그런 것이라고 받아들이면 새로운 일 진행하는 에너지가 삶을 힘차게 새롭게 만들어 줍니다.
이성엽 혹시 유학을 떠나고 싶어하거나, 공부가 아니더라도 새로운 도전을 하려는 직장인, 또는 미지의 세계를 망설이며 꿈꾸고 있는 10대, 20대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전경숙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은 자신감의 밑거름이요 성장과 삶에 대한 필수품입니다. 모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는 것도 두려워질 수 있습니다. 나가는 것이 두려운 사람은 있는 것도 두려운 거에요. 그러니, 다르다는 세계를 알아보고, 도전도 해보고, 적응도 해보고, 선택을 가져보면 융통성이 생기고 사람이 커집니다.
이성엽 국내 상담학 교수나 상담전문가 후배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으시다면? 전경숙 상담 혹은 심리치료는 이론과 학설이 아닙니다. 응용심리학은 삶 속에서 활용돼야 해요. 논리적, 합리성, 타당성만을 갖고 상담 장면을 대학원 강의실로 착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상담은 내담자의 경험하는 느낌을 트랜스폼(Transform) 시키는 임상수술입니다. 현장이 중요한 것이죠.
이성엽 만약 교수님께서 20대로 다시 돌아간다면?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전경숙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인생 본성의 최상의 경험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삶을 돕는 치유사가 되고 싶습니다.
이성엽 만약 40대가 된다면?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전경숙해보지 못했던 많은 것을 모험 해보고 싶습니다.
이성엽 만약 15년 전인 60세가 된다면 어떻게 다시 사시겠습니까? 전경숙 아직 살 날이 많이 남았으니 하고 싶은 일을 주저 없이 시작하겠습니다. 절대 늙었다는 생각 때문에 하는 일을 늦추지 않겠습니다. 60이면 한창입니다. 그때가 어쩌면 황금기에요.
이성엽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전경숙 내 돈을 들여가면서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삶을 의미 있게 즐기는 것입니다.
이성엽 앞으로의 꿈과 소망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요? 소개해주십시오. 전경숙 내가 세상에 와서 신세지고 받은 많은 빚을 갚을 수 있는 일을 사회에 남기고 해놓고 가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괴로움이나 힘든 갈등에서 벗어나고 의미와 보람을 느끼며 살수 있게 도와주는 NLP 전문가 양성기관 하나를 정착시키는, 확고한 사회적 체계를 다져놓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하면서 내내 가슴 뜀을 느꼈다. 이는 인터뷰이가 남들보다 멋진 학력, 멋진 경험을 한 외형적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소중한 삶의 순간순간을 후회 없이 열정적으로 보내는 전경숙 박사의 하루하루는 40대 한창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나에게 구두 끈을 더욱 조이고 후회 없는 순간을 보내라는 메시지로 다가왔다. 이를 눈치챘는지 인터뷰를 마치고 나가는 나에게 한 말씀 더하신다.
“나는 80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을 해야 한다’고 목표를 세운 적이 없습니다. 무엇을 하겠다는 각오를 다진 적도 없습니다.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거나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현실에 충실하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매 순간순간 그저 내 앞의 현실을 정성스럽게 대하다 보니 새로운 현실이, 새로운 문이 열리더군요. 앞으로도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저 현재에 충실하고, 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현재를 살다 보면 어디론가 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돌아보면 한번도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소리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많은 후배들이 그러더라구요. ‘미국에서 박사학위 받고 들어와 한국에 살았으면 많은 영광을 얻었을 것인데, 기득권 하나도 못 챙기고 나이 다 들어 60에 귀국하면 뭐 하냐. 진작 들어오지…’ 라구요. 제가 68년도에 박사학위를 받았으니 그때부터 정년 퇴직하는 90년대까지 뭔가 했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저는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매달렸습니다. 비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이렇게 평범하게 사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후회는 커녕 그저 감사합니다. 미국에서 교수로, 상담가로 40~50대를 보내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우고 내가 커졌는지 몰라요. 어쩌면 저는 이기적인 사람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후회 없습니다. 남편도 서울대 정년퇴직한지 10년이 훨씬 지났지만 새벽부터 나가서 일하고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제 인생이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인생은 아니지만 누구에겐가 조금이라도 용기가 됐으면 합니다.” |